
Intro
"시선은 입방체 밖에 있길 원한다. 그의 자유와 선택에 멍에를 씌울 수 있는 자격이 그 어디에도 없음을, 시공간을 매끄럽게 쪼개는 운명적인 만남이 그 속엔 없음을 진작에 눈치챘어야 한다. 텍스트로 환원되기 이전에, 이미지로 발화되기 이전에 순수한 정념만으로 빛을 발하는 짧은 시간을 시선은 거친다. 뜻하지 않게 이계異界에 머물 수밖에 없는 그 순간을 나는 잡아채야 하는 것이다."
사진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따로 배운 적 없이 혼자서 꽤 오래 사진을 찍었다. 배운 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인터넷엔 모든 정보가 다 있었고, 많은 사진 관련 책자와 예술에 관련된 서적들 그리고 수많은 훌륭한 작가들의 전시회가 부족한 나에게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처음엔 작은 취미로 시작했다가 지금도 여전히 취미다. 다만 조금 큰 취미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독서, 영화감상, 음악듣기, 등산 등등과 비슷한 카테고리였다가 좀 더 상위 카테고리로 올라간 취미라고 해두자. 업으로 삼고 싶었던 적도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왠지 즐겁지 않을 거란 느낌적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애초에 그런 생각은 접었고, 전업작가의 꿈을 갖기엔 미천한 실력인데다 오롯이 예술가의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해마다 있는 문화예술 지원사업에 이런저런 이유 또는 핑계로, 그 이유라 해봤자 나의 게으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지원을 하지 않다가 2019년에 들어서야 마음먹고 지원했는데 운 좋게도 간택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 사진집은 경상북도 예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자릴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한다.
처음엔 어떤 컨셉의 사진집을 만들지 생각지도 않았다. 포트폴리오는 블라디보스톡과 파푸아뉴기니에서 찍은 사진들을 추려서 신청을 했었는데, 막상 생각을 해보니 지금까지 묵혀 두었던 작품들 중에서, 특히 국내에서 찍은 사진들을 중심으로 선별하고 싶은 욕심이 들었고, 그래서 부랴부랴 사진들을 정리하고 분류하고 선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DEJA VU ISLAND는 원래 간차한 동인지 3집에 쓰려고 생각해두었던 제목과 컨셉이었다. 2012년 1집과 2014년 2집 이후 이런저런 이유 또는 핑계로, 그 이유라 해봤자 나의 게으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만, 간차한 동인지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고 마침 사진집의 제목으로 쓰면 왠지 근사할(?) 것 같기에 냉큼 쓰기로 했다. (여담이지만 현택훈 시인은 독자의 접근성을 위해 제목을 한글로 하길 추천했으나 고심 끝에 그냥 가기로 했다. 못 먹어도 고.)
잘한 선택인지 잘못한 선택인지, 아무튼 제목을 정하고 나니 선별해두었던 사진들 중 다수가 분위기에서 동떨어진 느낌이 들어 반절 정도는 가지치기를 했고, 개중에서 분량을 맞추기 위해 또 반절 정도는 가지치기를 했고, 개중에서 작품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반절 정도는 가지치기를 하면서 영혼까지 진이 빠지는 경험을 했다. 책을 만드는 건 늘 어려웠지만, 단독 작품집은 처음이라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책을 만드는 이 땅의 모든 작가와 출판사 관계자들께 경의를 표한다.
해서, DEJA VU ISLAND에 실린 거의 모든 사진들은 대략 2003년부터 2018년까지 국내에서 찍은 사진들로 이루어졌다. 작품집의 흐름을 돕기 위해 몇 장의 사진만 해외의 것을 사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표지로 쓰인 사진, 그러니까 이 홈페이지의 바탕화면에 걸린 사진이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 그 외 몇몇 해외 사진이 있는데 이는 'PHOTO' 메뉴에서 따로 밝히고 있다.
사진을 처음 시작할 시기부터 지금까지 계속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디지털을 병행한 적은 있지만 필름카메라를 놓은 적은 없었다. 이 사진집에 들어간 사진들도 대부분 필름카메라로 찍은 것들이다. 챕터 II와 III에 들어간 사진은 디지털 사진도 제법 포함되어 있고, 챕터 I, IV, V에 들어간 사진은 거의 다 필름사진이다.
이 홈페이지에는 이 글을 포함해서 몇 가지 사소한 비하인드스토리와 사진집에 들어간 작품들 중 특별히 기억에 남거나 언급하고 싶은 작품들을 골라 짧은 설명과 함께 올려두고자 한다. 관심이 있는 분들께 조금 더 재미를 선사하고자 하는 생각. 재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정성은 들였어요.- 우리는 언제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하니까.
그리하여 2019년, 나의 첫 사진집인 DEJA VU ISLAND가 세상에 나왔다. 부족한 사진과 부족한 글을 봐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내심 한 권이라도 더 팔아서 생계에 보태고 또 다음 작품을 더 열심히 찍으려는 마음도 크다는 걸 알아주시면 좋겠다. 이 땅의 모든 열정적이고 이름 없는 예술가들을 응원하고 사랑한다.
2019. 8. 12. 이 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