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문 - 현택훈
첫 사진집에 무엇보다 시인의 글을 싣고 싶었다. 그래서 인연이 있는 현택훈 시인과 오은 시인에게 부탁하였고, 둘 다 흔쾌히 응해 주었다. 이 자릴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시작도 힘들고 지속하는 것도 서툴기만 한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고마운 인연들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발문]
서늘한 그림자의 잎사귀를 사랑한 시선을 사랑하다
현택훈(시인)
그는 늘 이런 식이다. 사진가 이재. 바쁜 일상을 살며 사진은 찍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파일함에 사진이 가득하다. 같은 장소에 있을 때도 사진을 찍은 줄 몰랐는데 나중에 그 시간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곤 한다. 그래서 그의 사진집은 늦게 나온 느낌이다. 진작 나왔어야 했는데, 겸손한 그의 성격도 사진집이 늦어진 것에 한몫 했으리라.
사진가 이재는 그림자를 찍는 걸 좋아한다. 나중에는 거의 모든 피사체에서 그림자가 보였다. 그 그림자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사진 이면에 자리하고 있다. 그는 그 그림자들을 편애했고, 그 그림자들은 사랑 받아야 할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사물의 이면에 있는 그림자를 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내가 이재준(이재의 본명)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줄곧 카메라를 손에 쥐고 있다. 길을 가다가 대상 앞에 서서 한참 사진을 찍는다. 아스팔트 중앙선에 서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대상과 먼 곳에서 찍기 위해 일부러 아주 멀리 벗어나 사진을 찍기도 한다.
그는 언젠가 국립중앙박물관을 좋아한다고 내게 말한 적 있다. 전시를 볼 수 있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해질녘 야외 계단에서 바라보는 군상의 모습이 좋다는 것. 그만큼 그는 그림자를 사랑한다. 그림자는 흑백이다. 그는 아마도 그림자에 나타나는 빛에 매료된 것 같다.
우리는 그림자를 감추고 산다는 걸 이재의 사진을 통해 깨닫는다. 그는 낯익은 곳도 사진으로 낯설게 만드는 재주를 갖고 있다. 분명히 내가 가봤던 곳인데 그의 사진을 통해 보면 낯선 장소다. 그는 무엇을 본 것일까. 그는 그 장소에 있는 시간, 기후, 분위기, 음악, 대화 등을 다 담아낸다. 우리가 시각으로 세상을 볼 때, 놓쳐버리는 것들을 그는 사진을 통해 완성한다.
그의 또 하나의 재주는 반대로 낯선 곳을 낯익게 보이게 만들 줄도 안다. 이는 그가 시를 썼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는 꽤 오랫동안 시를 썼다. 시 역시 사물의 그림자 쓰기 아닌가. 하지만 이재는 어느 순간 시 쓰기를 멈췄다. 그러면서 사진은 계속 찍었다. 그러므로 그는 사진으로 시를 찍었다. 그가 시인의 길을 가지 않은 점이 나는 안타깝지만, 이렇게 근사한 사진집을 내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싶다.
우리는 ‘시화사악’이라는 이름으로 동인지를 함께 만든 적이 있다. 그때 그의 문장이 사진과 함께 빛났다. 블라인드의 틈을 들쳐보는 손가락의 푸른 정맥 같은 문장들이다. 그 문장들은 이제 사진 사이에서 그림자처럼 남아 짙은 바람을 일으킨다. 그리고 나는 그의 사진에서 그의 휘발된 문장들에 감탄한다
그는 여행지에 가면 꼭 미술관을 찾는다. 그에게 미술관은 사원寺院 같은 곳이다. 그는 미술관에서 전시 감상하는 건 물론이고, 미술관에 작품을 보러 온 사람들을 사진에 담는다. 그러니까 그의 사진 속 모델들은 카메라를 응시하지 않고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미술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 그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책이다. 그가 키우던 고양이와 함께 공놀이를 하다 그 책을 읽다 잠드는 게 하루의 일상인 듯한 방에서 그는 시집 사이에 그 책을 꽂아놓곤 했다. 언젠가 그가 내게 말했다. 사진 한 장 없는 사진집을 내고 싶다고. 그런 사진집이 가능하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키득거리며 고양이 쪽으로 테니스공을 던져주었다. 고양이를 사랑한 사진가 이재.
사진가 이재는 한때 대학교에서 사과 연구원으로 일한 적 있다. 그의 연구실은 암실은 아니었지만 그가 빛과 그림자로 세상에 대한 고심을 하던 곳이었다. 그곳에 적을 두고 그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녔다. 그 연구실은 그의 섬이고, 그는 낯선 곳으로 떠나 낯익은 감정에 불빛처럼 흔들렸으리라. 그 과정에서 찍은 사진들을 이렇게 볼 수 있으니 다행이다. 이 책 하나로 청춘의 그림자들을 다 소환할 수 있으니 이 책의 무게는 축축하다.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아 모델로 삼고 싶다고 말한 그는 결혼해서 아이 셋을 낳았다. 이제 앞으로 청춘의 잎사귀 넓은 그림자를 바라보던 시선이 가족과 함께 어떻게 변모할지 궁금하다. 그리고 이 사진집이 세상에 나왔을 때 사람들이 이 사진을 통해 차가운 그림자와 목도할 걸 생각하면 마음이 서늘해진다. 내가 그에게 어떻게 사진을 찍으면 잘 찍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물은 적 있다. 나의 우문에 그는 “대상을 사랑하면 된다”라고 말했듯 이 사진들은 그가 사랑한 목록들이기에 이 시원한 그늘이 사랑스러울 수밖에. 이제 우리가 그의 사진을 사랑할 차례다. ◈

현택훈
1973년 제주 출생.
2005 지용신인문학상, 2006 수주문학상, 2013 제주4.3 평화문학상 수상.
2007년 <시와 정신>으로 등단
시집 <지구레코드>, <남방큰돌고래>,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에세이집 <기억에서 들리는 소리는 녹슬지 않는다>
공저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제주 4.3은 왜?>
현재 제주도에서 김신숙 시인과 함께 시집 전문서점인 시옷서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세상에서 시를 제일 사랑한다. 아내보다 더 사랑하는 것 같은데 김신숙 시인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자. 아주 이상한 성격으로 그가 화내는 걸 본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재치 있고 유머러스하여 대화가 통하면 온종일 웃느라 지친다. 지금도 시를 읽거나 쓰고 있다. 안 봐도 비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