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I.
Chapter I은 인트로의 성격을 지니면서 사진집 전체를 아우르는 큰 주제를 품고 있다. 핵심 주제를 관통하면서 흐름을 이끌 수 있는 사진들을 골라서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해 수십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고, 그때마다 새로운 사진을 찾아 고민하며 많은 시간을 헤매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최대한 간결하고 명확한 29장의 흑백사진으로 구성이 되었다. 시작은 내 의지와 선택이 주가 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앞의 작품과 뒤의 작품이 서로를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여 내 눈과 손은 사진을 열심히 발견하여 거드는 역할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처음엔 계절의 흐름 순으로 단 열두 장의 작품만 생각했는데 어느새 내용이 방대해짐에 따라 부담감 또한 커졌고 생각도 많아졌다. 어쨌거나 덕분에 아카이브를 전체적으로 조망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이는 다음 챕터를 구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한겨울인 1월에 찍은 사진으로 경기도 양평의 두물머리에 있는 인상적인 나무다. 사진집에 들어갈 첫 작품으로 어떤 게 좋을까 한참을 마음을 비우고 아카이브를 탐험하다가 낯설면서도 비중 있는 장면으로 어울리는 듯하여 골랐다. 1월이었고, 강은 단단하게 얼어 있었고, 나는 어떤 의식을 치르듯 경건하고 묵묵하고 단호하게 저벅저벅 걸어들어가서 이 장면을 담았다.
두물머리는 근처를 지날 때마다 종종 들렀던 곳이다. 웅장하다거나 엄청 멋들어진 곳은 아닐지라도 일상에 지친 나에겐 그야말로 힐링과 사색의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많은 것을 기억하고 많은 것을 덜어냈다.
챕터I의 후반부에 이곳에 있는 조각배와 이 나무의 전경도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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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많이 갖다 쓴 사진이다. 사진집의 첫 사진 후보로 위 사진과 경합을 벌였다. 의성의 조문국 사적지가 완공되어 구색을 갖추고 있었을 때였다. 2016년, 그해 겨울은 눈이 많이 왔다. 당시 출근길에 스쳐 지나가다가 저 뷰가 언뜻 눈 에 들어왔고 시간이 없었던 나는 그대로 직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침 내내 머릿속에서 장면이 떠나질 않았다. 못내 아쉬웠던 나는 일하다 말고 잠시 외출하고 오겠다 하고는 다시 돌아가서 저 장면을 담았다. 그리고 매년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날씨가 매번 다르고 나무가 커감에 따라 이 느낌이 이제는 완벽하게 살지 않는다. 안 찍었음 어쩔뻔했어.

친구의 구두다. 벌써 15년이 지난...
아마 오랜만에 만났을 거다. 우린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고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탁자 밑을 보고 갑자기 필이 와서 허리를 굽히고 사진을 찍었다. 친구는 말했다.
"뭐하는 거냐?"
"사진 찍어"
"생쇼를 다 하는군."
뭐 이런 얘기가 오갔다. 그 생쇼의 결과물이 나는 마음에 들었고 이렇게 사진집의 첫 장에 기록되게 되었으니 뜻깊지 아니할 수가 없다.
이 사진집에선 몇 장 되지 않는 28mm 콘탁스 G렌즈로 찍은 사진이다.

4월의 벚꽃.
평소 자주 지나다니는 길 너머에 하천이 흐르고 있고 하천을 따라 벚나무들이 멋지게 줄지어 있다. 이날은 바람이 기분 좋게 불고 있었고 나무의 표정을 찍던 나는 바람의 흔적을 찍고 싶단 생각을 했고, 이 순간의 향기와 이 순간의 바람과 이 순간의 분 위기와 이 순간의 내가 고스란히 담기길 바라며 조리개를 끝까지 조였다.

내가 그의 사진을 찍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셔터를 누르자 그가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께서 꽃의 이름을 부르신 이후 수많은 사진가들도 하나의 몸짓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게다.
시선을 던지기 전엔 분명 거기 없었을 것 같은 장면 앞에서
'이번 씬은 반드시 흑백이어야만 한다'
라는 메시지가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는 순간이 있다.
1초, 2초, 3초...
정적이 흐르고 숨을 삼킨다.
꽃이 그렇다.

영천에 있는 시안미술관이다. 2005년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근처를 지나다가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안미술관에 처음 들렀었다. 그땐 저 조형물도 없었고, 잔디밭도 아닌 맨 운동장에 허름한 학교 건물이 다였다. 1층에서 한참 두리번거리며 구경 아닌 구경을 하고 있는데 페인트칠을 하던 한 여성이 멀리서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어요?"
"아, 지나가다 미술관이 있길래 그냥..."
여성분은 이제 막 열심히 꾸미는 중이라며 어색한 미소를 지으셨던 게 기억난다. 왠지 그 느낌이 좋았던 나는 이 미술관이 오래 건강하게 살아남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
다. 그 후 매년마다 2~3회씩은 방문했고, 갈 때마다 미술관의 모습은 달라져 있었다. 지금은 3층까지 꽉 찬 근사한 지역미술관으로 자리 잡았다. 언제 가도 좋은 곳.
이 장면은 2012년 8월 한여름이었다. 비가 그친 뒤였고 날은 여전히 흐렸다. 컬러필름이 아닌 게 안타까웠던 순간이다.(이때나 지금이나 내 사진의 8할은 흑백필름이다.) 2층 카페의 테라스에서 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는데 새빨간 원피스를 입은 한 여성이 초록 잔디밭의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나는 감탄을 연발하며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다. 부족하나마 폰카로 찍은 사진 두 장을 아래에 첨부하였다. 그 날의 느낌이 전달되도록. 위 사진은 미놀타 하이매틱 7s2와 Tmax400으로 찍었다.



2009년 3월 7일. 국립중앙박물관이다. 이날 멀리서 온 현택훈 시인과 역시나 멀리서 온 내가 이곳에 있었다.
박물관을 몇 바퀴 돌았나 모르겠다. 이곳은 나에게 어떤 장면을 선사해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고 나는 쉬지 않고 유영하듯 부유하듯 박물관을 떠돌며 셔터를 눌렀다. 순간 멀리 왼쪽에서 나를 지나쳐 달려가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또 잠시 후에 멀리서 다른 사람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렌즈의 화각을 생각하면서 한 발, 두 발 뒷걸음질치며 천천히 카메라를 눈에 대고 숨을 죽였다.

2015년 10월 거제도 바람의 언덕이다.
당시 사용하던 콘탁스T3는 고질적인 베리어 문제가 간혹 발생하기 시작했고 전원을 켜면 다 열려야 할 베리어가 일부 열리지 않고 엉거주춤하게 렌즈를 가릴 때가 있었다. 그걸 확인하지 않고 그 상태로 찍은 사진이다. 그래서 나타난 저 검은 두 줄 때문에 이 사진은 내 마음속에 콱 들어와 박혀버렸다.
매 순간 모든 공간에서 우연한 실수 또는 선택이 우리를 어떤 뜻밖의 결과로 이끌어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 않은가.

2018년 3월 봄의 초입, 늦은 겨울에 눈이 제법 많이 내렸다.
기차가 지나가고 건너편에선 나와 같은 표정으로 지나가는 기차를 보는 사람이 있다. 사람과 사람을 사이에 두고 기차가 지나갔다. 딸랑딸랑하는 경보음이 사라지고 건널목에 섰다. 정지 푯말 하나쯤 품고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건너편 사람 또한 사진을 찍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눈은 계속 쌓이고, 기찻길은 먼 소실점으로 사라진다. 기차가 사라진 곳을 보며 끝도 없는 선로 위를 깨금발로 내딛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언뜻 떠올랐다가 눈발 사이로 사라진다. 어깨가 젖는 줄도 모르고.

장성군 백양사.
백양사 바로 앞에 백양다실이라고 찻집이 있다. 12월 31일에 이곳에 들렀다. 사장님께서는 설경을 좋아해서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이곳 백양사의 설경이 제일 마음에 들어서 자리를 잡으셨다고 했다. 마침 눈이 많이 내렸고, 사장님의 말씀에 십분 공감했다. 눈 오는 겨울에 꼭 다시 찾아와서 사진을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지 벌써 7년이 지났다.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찾고 싶은 곳 중 단연 첫 번째 장소.
절앞을 거닐다가 스님이 쓸어놓고 간 눈길을 따라 걸었다.

챕터 I을 마무리할 이미지를 찾기 위해 역시나 아카이브를 헤매고 헤맸다. 이 사진은 2011년 12월 무주에서 담았다. 케이블카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올랐다. 칼바람이 엄청 불었고, 눈이 휘날리다가 방금 그쳤고 세상은 온통 새하얀 가운데 멋들어진 고목들이 눈발을 품고 차가운 기운을 뿜고 있었다. 챕터I은 계절을 기점으로 겨울에서 시작해서 겨울에서 끝난다. 시간의 흐름과 인연의 스침을 풍성하게 표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일상의 익숙하고도 낯선 풍경 속에서 기억을 담아내고 또 담아낸 기억을 덜어내고자 애썼던 나의 흔적을 전달하고 싶었다. 바람이 불고, 눈이 오고, 비가 내리고, 꽃이 피고 지고, 우리는 만났다가 머물렀다가 어디론가 떠난다.
인생의 한 지점에서 어떤 질문을 던지거나 답을 찾거나 하는 수많은 시간들이 녹아나는 사진을 쌓으며 조금씩 나아가는 것, 그 끝에서 나는 나를 만나고자 하는 것, 나를 떠나서 다시 나를 만나기까지 무수한 여정 중에 사진이 작은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